대화, 그렇다. 그의 작품에 내재된 조각적 진실은 대화를 유도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면 차가운 피부 안쪽의 정일함을 이끌어 내고 싶은 마음의 동요를 유인하기도
한다. 그것은 대화를 만들려는 내적 울림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절제된 욕망의 그물이
들어서 있다.
그의 조각적인 특징을 굳이 말한다면 자연스러움이다. 무의한 자태라고나 할까.
분명한 것은, 미적 진실을 구현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면 인위를 배제하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진실이란
과장되거나 특정 부분이 강조되는 곳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한 인체의 중심선을 좌우로 나누어 어긋남이 없는
균형에 있기 때문이다. 인체조각에서 균형만 완전하다면 동세감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과장된 동작은 자칫 시선의 이동을 차단하고 인체로서의 긴장감을 깨뜨리기 십상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스러움을 파괴할 뿐인, 인체를 사역하는 작가적인 욕망이 더욱 크게 자리하기
때문이다.
작품에다 작가적인 존재감을 표출시키지 않는 일이야말로 예술 자체의 자연미에 충실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어제나 내부지향적이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억제되거나
소극적인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윤곽선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내부지향적인 동세
속에서 떠오른다.
머리 위에 쏟아지는 빛은 거슬리는 데 한 곳 없이 자연스럽게 흘려내려, 끝내는 발끝에
닿아 땅으로 스며드는 매끄러운 흐름을 보여준다.
누드가 대부분인 그의 작품들은 스스로의 운명에 깊이 빠져있는 것 같다. 순종의
미가 있다. 그 순종의 대상은 자연이자 생명이다.
그의 작품에는 사색의 터가 있고, 거기에 잇닿은 순수미가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볼륨은 다소 빈약한 듯 보이지만 넉넉한 인격미로 나머지의 모든 것을 지탱한다. 그
인격미는 필경 작가의 그것으로부터 연원한다.
거듭하거니와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진실은 자연미에 둔다. 아름다움만 하더라도 자연을
능가하는 것이 이 지상에 도대체 따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는 어디 한 군데도 소홀하지 않는 치밀함으로 볼륨을 만들고, 그 볼륨에 필요한 그늘을
둔다. 그 같은 그늘에서 생명감이 번져 나온다.
때로는 면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한 듯싶으나, 완전한 동체를 실현하는 한 지나치게
친절한 세부표현은 자칫 구차한 자기 설명이 될 뿐이기에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으로
만족한다. 복잡한 표현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산문적인 세부묘사가
작품의 진실을 보태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의 조각은 대상의 모습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심인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그의 조각의 형태적인 측면을 볼 때 상징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하면 지나친
작의가 노출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자신의 마음 안쪽에 각인된 미의식에 비쳐지는 동체는 언제나 사유를 간직한다. 그러기에
어떤 포즈의 작품에서도 사유하는 조각으로서의 내적 의미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대상에의 직역적인 묘사기법은 배제된다. 설령 모델을 눈앞에 항상 두고
있는 경우일지라도 실제 작품에서 모델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동체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통해 인체의 전형화를 이미 자신의 손끝과 마음속에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모델이 지닌 신체적인 특징 따위가 문제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는 다만 조각가적인 기능으로부터 형성된 미의식이 이끄는 대로 따르며, 그에 부합될
수 있는 의미내용을 주제로 하여 담담히 상을 열어감으로써,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미적 가치를 최종적으로 얻고 있을 뿐이다. |